국영수가 아니어도 괜찮아 by bobab

역시 형제라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듣는 준수와 준하. 하지만 부모인 우리가 보기엔 둘은 참 많이 다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다르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책을 대하는 태도(?)이다. 

요즘 아이들 키우는 부모들이야 다 그렇겠지만, 우리도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책을 읽어 주었다. 돌이 되기도 전부터 헝겊 책을 쥐어 주었고, 그림과 문양만으로 이루어진 책부터 시작해서 그림동화책을 정말 많이 읽어 주었다. 그런데 같은 부모에게서 난 아이들에게, 같은 책장의 책들을 읽어 주어도, 그걸 받아들이는 두 아이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달랐다. 

일단 준수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 주기를 바랬다. 아주 재미 없는 책이 아닌 다음에야 다 읽고 나면 반드시, “또 다시!”를 외치곤 했다. 우리 생애 첫 아이에게 즐겁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을 고대했던 우리 부부에게, 책 읽어주기는 노동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항상 같은 책을 그 자리에서 너댓번은 연속해서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준수였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수행하는 심정으로 책을 읽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준수가 혼자서 책을 읽고 있더라. 실제로 글자를 알아서가 아니라 책을 통째로 다 외워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책을 다 외워버린 준수는 ‘꾸러기 곰돌이’ 시리즈 같은 단순한 책을 통해서 혼자 한글을 깨우쳤다. 그림을 외우듯, 글자를 외워버렸다. 그렇게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 후부터는 혼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준하는 같은 책을 다시 읽어 주기를 바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런 점은 읽어 주는 사람으로서는 지루하지 않을 수 있어서 참 좋다. 그러나 꾸러기 곰돌이 시리즈와 같은 두 세살 수준의 책을 닳도록 읽어주고서 책 읽어주는 일에서 졸업하는 일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준하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나, ‘고양이도우미’, ‘호기심 씨앗동화’와 같은 아주 아주 긴 책들을 읽어주도록 아직까지도 ‘듣고만’있다. 나야 ‘이 아이도 때가 되면 글자에 관심을 갖게 되겠지’ 하고 기다리자는 주의지만, 승환은 준수 때를 생각하며 조급해진 것인지, 마냥 읽어 주는 것이 이제는 귀찮은 것인지 – 아마 둘 다 이리라 – 준하에게 자꾸만 글자를 가르치려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때가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준하는 이제 자주 글자를 짚으며 읽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림책을 읽어 줄 때면, 아직도 준하의 눈은 그림 쪽에 가 있지, 글자 쪽에 가 있지 않다는 것을.

준수 같았으면 저 혼자 책을 줄줄 읽었을 나이에 준하는 아직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글자가 별로 없다고, 이건 심하다고 승환은 말한다. 가끔 준하에게 “야, 형은 네 나이에…”라고 타박까지 한다. 내가 절대로 못하게 하는 말인데도. 

승환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준하에게는 준수와는 다른 면으로 감각이 매우 발달해 있다. 준하는 모양, 색상에 대한 감각이 정말 예민하다. 어릴 적부터 내가 입는 옷, 머리 모양까지 간섭하던 아이, 지금도 내 옷 중에 자기가 마음에 드는 옷을 입으면 예쁘다고 보기 좋다고 칭찬하는 아이가 준하이다. 다른 사람은 미처 발견해내지 못한 미세한 부분의 형태적 차이나 특징을 잡아내는 것도 늘 준하였다. 

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소위 국영수 - 국어, 영어, 수학 - 를 제일 못했다. 국어는 그나마 좀 나았지만 영어랑 수학은 특히 자신이 없었다. 반면 미술, 체육, 가사와 같은 비주류 과목은 나에겐 가장 신나고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 국영수의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 교육체계에서 내 그러한 적성은 참으로 불리했다. 똑 같은 100점인데도, 수학 100점이랑 체육 100점이랑 소위 받는 대접이 달랐다. 국영수를 잘하면 똑똑한 아이로 보이고, 미술이나 체육을 잘하면 잡기에나 능한 아이로 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러한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 지능을 의심했을 정도니까,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는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지금도 그런가?)
그러나 되돌아 보니, 왜 그랬었나 싶다. 수학이랑 미술은 그저 ‘다른’ 과목일 뿐,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왜 그토록 모든 잣대가 대입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참 속상한 일이다. 체육을 잘 하는 나를 충분히 자랑스러워 했어도 좋았으련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준수처럼 말을 잘하면 똑똑해 보이기 쉽다. 그런 건 자랑하기도 쉽고 칭찬하기도 쉽다. 하지만 준하처럼 일상생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감각은 그럴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래도 엄마인 나는, 적어도 나만큼은 열심히 인정해주고 싶다. 국영수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두려워해야만 할 것들 by bobab

오늘, 모처럼 아니 보통 주말에만 허락되는 자유시간에 혼자 Oxford street에 나갔다. 사실 준수의 교복용 티셔츠를 John Lewis에 환불하러 간 것이었으나, 덕분에 밤거리를 화사하게 수놓은 Christmas 장식들을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썼던 장식의 재활용이었으나 여전히 화려하고 예뻤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가지를 발견했다. 그 번화한 Oxford street가, 일년 중 가장 바쁘다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도로 공사중’이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난 그 거리가 늘 놀라웠다. 런던의 가장 번화한 거리 중의 하나인 거리가, 차도가 달랑 2차선이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거리를 달리는 차들은 주로 2층짜리 붉은 시내버스와 검정색 택시, 혹은 인력거들이었다. 자주 막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쉼 없이 차들과 사람이 오가는 번화한 거리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쁜 거리를 아예 공사중 이라고 완전히 막아 놓은 것이다. 직교하는 길은 차들이 다닐 수 있긴 하지만, 주요도로는 인력거도 다니지 못하는, 아예 보행자용 도로가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 영국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랑 걱정하는 것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사람들은 차의 통행을 막는 일이나, 차도를 좁게 만드는 일을 두려워한다. 차의 원활한 통행을 방해하는 것이 큰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시골이든 어디든, 차도를 넓히면 길이 좋아졌다고 말하고, 차가 지나다니기 좁은 길은 좋지 않은 길이라고 말한다. 광화문 앞이나, 종로나, 명동 롯데백화점 앞이나, 내가 느끼기에 한국의 차도는 바다처럼 드넓다. 반면 안 그래도 좁은 보도는 반쯤은 전기박스나 노점상 때문에 좁혀져 있어 걸어 다니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다. 

왜 그렇게 차도를 좁게 만드는 일이 두려울까? 대중교통을 이용하길 장려하고,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들겠다면서, 왜 보행자보다는 차량이용자의 편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 단언컨데, 서울 시내의 차도는 지금의 절반의 폭이 된다고 해도 괜찮을 만큼 충분히 넓다. 차도가 좁아서 시내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는 일이 불편하면, 그만큼 차를 안 가지고 다니게 되는 것 아닌가? 대신 걷기 좋은 거리를 만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다듬으면 될 일이다. 

한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짜증이 났던 순간이 정말 많다. 그 중 하나는 버스 정류장을 행선지끼리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좌석버스와 입석버스로 나누어 놓은 곳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그 두 정거장의 거리는 너무도 떨어져 있어서, 버스가 온 걸 보고 뛰어가서 잡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었을까? 그리고 그걸 보정할 다른 머리가 그렇게 없었단 말인가? 신기한 일이다. 또 하나는 엄청나게 긴 환승거리이다. 일례를 들면, 논현역 버스 정류장은 정확히 신사역과 논현역 사이 한 가운데 있다. 차량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위치 같은데, 그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자는 족히 버스 한정거장은 되는 거리를 고스란히 걸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버스정류장의 위치도 그렇다. 지하철 출입구는 보통 교차로 부근에 있는데, 버스 정류장은 항상 지하철 출입구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만든다. 환승거리도 절대로 무시 못할 대중교통의 중요한 요소다. 아무리 지하철이 빨라도, 아무리 버스가 저렴해도, 환승거리가 길면 대중교통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나는 궁금했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도로 시스템인가?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 하고.

나는 런던의 좁은 차도가 좋다. 언제나 차도만큼, 때로는 차도보다 넓은 보도가 좋다. 내가 보기엔, 영국 사람들은 차량 이용자의 불편함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보행자의 불편함을 더 두려워한다. 

한국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제발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량이용자들보다는 보행자들을, 대중교통이용자들의 편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한국의 행정을 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특히 국회의원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매일매일 마음이 무겁다.
날치기 통과가 가능한 국회 시스템(오늘 무슨 안건으로 회의를 할 것인지에 대한 공고를 적어도 회의 하루 전에 모든 국회의원에게 하지 않고서도 안건의 표결이 가능한)이 난 아직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제서야 판사들이 한미 FTA가 사법주권을 내놓은 불평등조약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를 했다는 사실이, 그만큼 충분한 검토와 사회적 합의가 없었던 조약이 날치기로 통과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는다. 

이대통령이 생각하는 대로, FTA에 반대하는 국민이 거리에 모인 딱 그만큼 뿐 일지도 모른다. (난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그러나 그들도 국민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두려워할 아니 적어도 어려워하고 존중해야 할 국민이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어떤 노력이 있어왔나?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어떤 투명한 논의가 있어왔던가? 내가 보기엔 이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보다 미국을 더 어려워하고 존중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진정한 국익이란 무엇일까 by bobab

오늘 아침 침대에서 꿈속을 헤매고 있던 나에게 승환이 날린 한마디는 내 잠을 확 달아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FTA 통과 됬대.”
“어떻게 그럴 수가?”
“한나라당 위원들끼리 모여서 표결해버렸대.”

정치에 대해 무식한 나니까, FTA에 대해 무지한 나니까, 조목조목 따져가며 이건 이래서 잘못된 거고, 저건 저래서 하면 안 되는 거다 설명하기는 벅차다.
그런데 적어도 한가지 분노 섞인 의문은 품게 되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날치기를 해야 했던 걸까?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은 국민들의 뜻을 대표해서 국회라는 자리에 있는 거고, 그러면 적어도 모든 국회의원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중대한 사안은 표결되어야 하는 거다. 다수결이 민주주의가 선택한 마지막 카드라고 해도, 이런 식의 날치기는 동네 꼬마들이나 해야 하는 거다. 아니 사실 한낱 동네 꼬마들이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면 어른 누구라도 나서서 말려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FTA를 추진했을 때, 난 솔직히 많이 실망했었다. 지금도 반대지만, 그때도 반대였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FTA가 4년 동안이나 미국 의회에서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난항을 했던 것을 보면, 단번에 일사 천리로 미국의회를 통과한 이명박 정부의 FTA보다는 우리나라엔 덜 불리한 내용이었나 보다 싶다. 우리나라는 왜 미국처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시간을 충분히 들여 함께 검토하고 토론하지 않는 걸까? 왜 이렇게 날치기까지 하면서 국내법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국제 조약을 서둘러 통과시켜야 하는 걸까? 국익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오로지 돈만이 국익인 걸까?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하는 것, 그런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가는 것 또한 국익 아닌가? 전체적으로는 덜 부자더라도, 고르게 다 살만하게 사는 것, 그 것 또한 국익 아닌가? 

슬프다. 
아니 두렵다.
우리나라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를 이끄는 힘 by bobab

며칠 동안 정신 없이 아팠다. 열이 나는 감기였는데, 열이 나니까 속이 좋지 않아 거의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난 원래 가끔 감기를 앓을 때면 단식을 해서 몸 안을 청소하는 계기로 삼는데, 이번엔 너무 오랫동안 먹지 않으니까 오히려 속이 아팠다. 그래서 동네 친구엄마의 권유대로 슈퍼마켓에서 파는 토마토수프를 사다가 먹었다.

엄마는 아파도 애들은 배가 고프니 점심, 저녁, 간식 거르는 법 없이 먹여야 한다. 그래서 정말로 대강, 최소한의 노력으로만 준비를 해서 먹였다. 밥 차려주고 나는 쓰러져 누워있고, 그런 식으로 며칠을 살았다. 죽 끓여주는 사람 없어도, 죽 파는 가게 없는 나라에 살아도, 수프와 같은 훌륭한 대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역시 어디든 다 사는 방도가 있는 것이다.

아프니까, ‘내가 그 동안 뭘 잘못했나…’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번엔 왜 이렇게 아프게 되었을까’부터 시작해서, 그 동안 운동도 별로 안하고, 몸에 안 좋은 음식도 많이 먹고, 술도 자주 마시고… ‘건강관리를 참 안 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들. 

이럴 때 마다, ‘이러지 말아야지. 내 몸을 소중히 생각하고 아껴주어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다. 내가 무언가 나쁜 일을 할 때도 그렇다. 이러지 말아야지, 엄마아빠가 이걸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하는 생각이 나를 다잡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나를 제대로 가야 할 곳으로 이끄는 것은, 극진한 “사랑”임을 알겠다. 엄격한 잔소리도, 훈계도, 누군가의 협박도 아니다. 도덕책에서 배운 윤리도 아니다. 내 존재를 극진히 아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랑”이야말로 언제나 나를 바른 곳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유통기한도 없고, 공간의 제약도 없다. 아무리 오래되어도, 아무리 멀리 있어도, 사랑의 힘은 그 어떤 동기보다 강력하다. 

나는 내 아이들이 살면서 되도록이면 바른 행동을 하기를, 바른 길을 선택하기를 바란다. 성급한 마음에 잔소리를 하고, 훈계도 하곤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겠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움은 ‘축적된 훈계’가 아니라, ‘조건없는 사랑’임을.


 



조규찬 by bobab

조규찬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인이다. 비록 그의 얼굴을 화면에서 처음 본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지만, 그의 음악만은 십 년도 전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목록에서 일등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얼핏 보기엔 아무 색깔도, 문양도 없는 흰 종이 같다. 하지만 가만히,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도톨도톨한 질감이 더없이 매력적인 두터운 도화지처럼, 몹시 섬세한 디테일이 있다. 가사를 발음하는 그의 입은 그 발음이 끝났다 싶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또 한번 변화한다. 모든 소리는 각자 다른 호흡과 길이와 마무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소리의 두께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잠든 아기의 숨결처럼 부드럽고 미세하게 움직인다. 그런 그의 음악은 듣고 있으면 가슴이 늘 따뜻해진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같은 슬픈 노래조차 그렇다. 그냥 흰 색이 아니라 따뜻한 아이보리색 종이인 것이다. 또한 그의 음악은 나로 하여금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위에 무언가 내 이야기를 그리고,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빈 종이 같은 음악이다. 어깨를 들썩이게 하거나, 대단한 열창이구나 하면서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 빠져들게 하진 않는다. 대신 그의 음악은 내 속으로 들어와서 가슴 한 켠을 살짝 건드리고 나간다. 

나는 “나는 가수다”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미련하게도 보일만한 그 고집을 존중한다. 비록 일요일마다 그의 풍부한 음악세계를 만나는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 더없이 속상하지만 말이다. (그가 최종 탈락한 그 날, 난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예술가로서, 그만큼 자기 세계에 대한 고집이 없다면 어떻게 지금의 그가 있을 수 있었을 까. 그는 나에겐 진정 훌륭한 음악인이다. 그가 있음이, 그의 음악이 존재함이, 감사하다. 

그의, “서울하늘”이라는 노래.

참...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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