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에서의 야근

나는 야근을 거의 하지 않는다. 늘, 칼퇴근을 한다.
내가 하는 일의 속성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놀랄 것이다. 건축설계사무소란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직장이니까.
그럼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 다 나처럼 칼퇴근을 하느냐, 물론 아니다. 우리 사무실 사람들은 여느 다른 설계사무실처럼 야근을 자주 한다.

출산과 육아를 위한 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지난 8월부터 지금까지 나의 휴일근무와 야근일수는 2주일이 채 되지 않는다. 다른 직원에 비하면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수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당당하게 지내왔다. 야근을 자주 하진 않지만, 내게 주어진 일을 결과적으로 제대로 해내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때론 그게 너무 버겁기도 했다, 내가 무슨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마감이 임박한 프로젝트에서 야근을 하지 않기위해, 내게 주어진 낮시간은 너무 짧고 긴박했다.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때도 많았다. 그러나 일이란 원칙적으론 기본 근무시간내에 처리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고, 야근수당도 주지 않는 직장에서 야근을 하지 않는다고 압박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지내오던 내게, 얼마전 태클이 들어왔다.
상황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게 하면 팀웍이 깨지지 않느냐는 사무실 상관의 충고-겸 경고였다.

나 혼자하는 일이 아니라 셋이 함께 하는 일이어서 여느때와는 달리 연짱 3일 야근을 하고 그날따라 몹시 심란해서 집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승환을 위로하고, 일주일째 감기가 떨어지지 않고 있는 준수를 재우기 위해 밤10시가 지나서 집에 들어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서던 참이었다. 팀장이면서, 팀원들을 뒤로하고 늘 먼저 퇴근하는 내가 항상 눈에 걸렸던 것 같았다.

그날 느꼈던 서운함과 분노는 몇시간만에 쉽게 사그라들었다. 나는 늘 우선순위가 분명한 편이므로, 나에게 있어서 이 일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리 그런 귄고를 듣는다고 해도, 내 생활원칙을 바꿀 생각은 없으므로 도대체 문제가 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문제는 이거다.
나는 야근을 차마 하지 못한다. (물론 휴직하기 전엔 안그랬다. 야근도 많이하고, 철야도 하고, 직원들의 회식자리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준수가 보고 싶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이유는 남편때문이다. 남편이 나에게 야근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야근하라고 한다. 하지만, 하지만, 하루종일 집에서 혼자 준수를 돌보면서 아침도 먹이고, 점심도 먹이고, 저녁도 먹이는-이부분에서 난 늘 눈물이 난다-외로운 일상을 견뎠을 남편을 생각하면 난 정말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도저히 야근을 할 수가 없다. 아이랑 함께 지내는 데 왜 외롭냐고?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바쁘면서도, 생각이 통하는 한마디를 건낼 사람이 없는 시간속에서의 외로움을. 난 그런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집에서 내가 돌아오는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나 잘 알기에 야근을 쉽게 할 수 없다.

근데 나에게 경고를 준 그 상관에게는 야근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딱히 할일이 없어도 한팀의 다른 직원들이 남아있는 한 퇴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그분의 모습은 팀웍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 기혼남들중에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이를 키우며 집에 있는 아내들을 위해 퇴근시간을 앞당기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난 감히 단언한다. 애가 태어났으니 축하한다고 술마시자고 붙잡는 것이 우리나라 남자들이다. 집에가면 애봐야한다고 야근하는 인간들이 우리나라 남자들이기도 하다. 내 상황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있을까?
야근이 쉬운 사람들에 의해, 야근을 하는 것을 전제로 짜여지는 업무 스케줄을 내가 따라가야 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직장을 위해 모든 시간을 헌납하기를 종용하는 사회때문에, 우리나라 가정은 힘겨워하고 있다. 배우자와는 시간과 공간의 단절로 인해 대화가 사라지고 있고, 가장 사랑스런 시기의 자녀의 성장을 충분히 지켜보지도 못하다가 자녀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서먹함을 귄위나 물질로 무마하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가슴아픈 상황인가.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야근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야근하며 늘어지는 경우도 부지기 수다. 사회가 좀 더 합리적으로, 개인의 가정생활을 존중하는 방향의 스케줄을 짜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by bobab | 2006/04/03 03:05 | 건강하게 살아가기 | 트랙백(3)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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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pupucaca.com.. at 2006/04/04 08:09

제목 : 아기를 키우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HTML]아래 글은 보림의 이 글에서 트랙백한 글이다.[/HTML] 벌써 집에서 준수를 키운지 9개월 째에 접어들었다. 보통 직장을 옮겨도 6개월이 넘어 1년 가까이 되면 웬만해서는 별 무리 없이 적응이 되듯, 내게 주부라는 직업도 어느덧 익숙해진 느낌이 든다. 준수가 많이 자라 이제는 제법 말귀도 잘 알아듣고 때때로 이것저것에 집중하여 혼자 잘 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몇 개월간 살림과 육아에 관한 요령도 많이 늘었고, 무엇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리듬을 타는 법을 어렴풋이 파악했기 때문인것 같다. 그러나......more

Tracked from 잘 키운 용 한마리 열.. at 2006/04/29 07:25

제목 : 아빠의 육아에 관한 생각
「 울나라 직장의 야근문화와 육아관계에 대한 bobab님의 글 」을 읽고..... sy가 그녀 특유의 어조로 남자들의 거시적이지 못한 행동을 비판했다. 가정을 멀리하는 야근은 결국은 자기만 외로워지는 건데 그걸 모른다고! 그들 (아기를 가진 직장인 아빠) 들은 모른다. 아기를 오롯이 혼자 돌본 적이 없을테니 알수가 없겠지. 혼자 짊어져야 할 짐이라 생각하니 피하고 싶겠지. 짐의 무게로 오는 중압감과 고독을 표현할 수 없으니 더 외롭겠지......more

Tracked from 배트맨이 들려주는 이야.. at 2006/11/24 17:58

제목 : 글을 읽어가면서 느낄 수 있었던 사랑의 범위와 정의
직장생활에서의 야근 위의 링크는 이글루스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트랙백을 해온 글이다. 글의 제목만을 본다면 직장인의 고충과 애환을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구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표현일수도 있겠지만 <이터널 선샤인> 같은 영화를 보면서 사랑의 본질과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듯이, 나는 위의 글을 읽어가면서 비슷한 생각을 잠시 그러나 깊게 할 수 밖에 없었다. 트랙백을 하기로 한......more

Commented by 타리 at 2006/04/03 03:57
마지막 두대목이 가슴을 두드립니다.글 정말 잘쓰세요^^
Commented by runaway at 2006/04/03 05:41
맞습니다. 일은 공식적으로 정해진 근무 시간을 잘 활용해서 처리해야 하지요.
단순히 늦은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해서 업무를 더 잘 해내는 것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결혼 전엔 몰랐는데, 결혼하고 나니 아직도 사회는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가끔 경험하게 됩니다. 뭐랄까... 씁쓸할 따름이죠.
Commented by 해피맘 at 2006/04/03 15:19
세상의 절반 여성에게 너무나 무리수가 많은 세상임을 일하면서 절감합니다.저도 우선순위가 아이에게 있기에 야근은 안하고 있지요 눈치주어도 전 그냥 무시해 버립니다. 인사평정에 불이익을 받아도 하는 수 없지요..내가 중요하다 생각하는게 우선이니까.낮에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일하면 사실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대부분이긴 하거든요..합리적인 세상이 빨리 오기를 저 역시 바래봅니다..
Commented by 종환 at 2006/04/06 01:03
난 오늘로 연짱 5일째 철야다. 그냥 철야가 아니라 거의 꼴딱 새는.. ㅡ.ㅡ
아마 이래서 장가를 못가는건지... ㅋㅋ
Commented by biposh at 2006/04/11 13:01
그래...일, 가정, 비효율적 업무시스템...
어제는 범수에게..."***다니는 사람은 좋은 근무조건에 칼퇴근이야..." "미국 설계 사무실은 왜 일찍 퇴근이 가능할까?"

보림아 가정과 일을 너 나름의 방식으로 잘 지켜가는 네가 사랑스럽구나
Commented by 성윤 at 2006/04/19 04:31
보림~~ 네 글 읽으니 기분이 다 좋아진다. '그래 그래...' 하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이게 되는 걸...

Commented by mummy at 2006/05/03 12:50
PEOPLE에 선정되신거 축하드려요..저는 신혼 2달째 구조엔지니어랍니다.
말씀마다 가슴에 와닿네요...
Commented by 분홍복면 at 2006/05/03 13:29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워킹맘이라 너무나 잘 이해가는 상황이예요.

제 남편은 집에서 살림하지는 않지만 출퇴근이 비교적 자유로운 일을 하기 때문에 남편한테 애를 맡기고 야근하는 게 물리적으론 어렵지 않지만, 종일 엄마 기다린 아이 얼굴을 생각하면 안쓰러워서 가능하면 집에 늦게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사실은 저는 정말 열심히 일하려 맘먹는다면 밤마다 '야근'을 해야할 판인데요(직장에서 늦게까지 일한다는게 아니라 밤에 주로 모임이 많은 일이라서요), 일을 덜하더라도 가정을 꾸린 이상 저녁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나마 태클 한번 밖에 안받으셨다니 그 직장은 좋네요. 저는 들어갈 때부터 '결혼한 여자는 야근을 못해서 안돼'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때 "결혼한 남자는 야근해도 되나요? 야근은 누구든 안할 수 있으면 안해야죠"라고 맞받아쳤었죠.

주변에 보면 거의 혼자 애키우는거나 다름없는 외로운 생활을 하는 주부들 너무 많아요. 너무 슬프죠. 가정을 우습게 보는 풍토 속에서 우리나라의 가정은 벌써 해체된지 오래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너무나도 at 2006/05/07 00:38
공감이가는글입니다. 실례가 되지않다면 저희 회사게시판에 이 글을 올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멋지게~ 꿋꿋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님의 글들은 많은 용기를 주네요~
Commented by 해방 at 2006/06/18 15:48
흠... 야근이 가사노동을 피하기 위해 하는거라면, 스님들은 육식이 싫어서 스님이 된건가 보군요. 궤변 대단하십니다.
Commented by 수영맘 at 2006/08/13 14:48
열린가족조산원에서 이리로 왔는데요...저는 건설회사에서 일했었거든요..님의 글에 많이 아주많이 공감...제 주변의 남자들도 눈치보면서 딱히 바쁘게 처리할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퇴근안하는 사람(남자들) 많았지요..가족들과 함께하려하지 않고 꼭 회사동료와 함께해야지 안심을 하는 대책없는 집단의식,,동질감..이런거 다 군대문화지 않을까 생각한답니다..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6/11/26 20:38
잠시나마 깊게 생각하게 해주는 글귀가 있어서 트랙백을 해갑니다.
진실된 사랑을 알고, 실천해나가며 베푸시는 두 분이 너무 부러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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