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먹이는 일

나의 하루는 아이들을 먹이는 일로 채워진다. 일어나자 마자 아침 챙겨서 먹이고 치우고, 조금 있다가 점심 차리고 먹이고 치우고, 빨래 널거나 잠깐 쉬었다가 간식 만들어 주고, 또 저녁 반찬 만들어서 차리고 먹이고 치우면 하루가 다 간다.

나는 아이를 먹이는 일에 있어 몇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아이가 먹여달라고 하면 먹여주되, 내가 밥숟가락을 들고 애를 쫒아다니진 않는다는 것. 둘째는 아이가 먹고 싶어할 때까지만 먹게 한다는 것. 즉 절대로 억지로 먹게 하진 않는다.

우리 아이들은(아마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배가 아주 고플때만 상에 붙어 있지, 조금만 배가 부르면 놀러 가버린다. 그러면 한명 한명 불러가며 밥숟가락 입에 넣어주며 먹이는 일이 내가 하는 주요 임무다. 아이들은 먹는 일을 어른처럼 '한자리에 앉아서 해야하는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눈 뜨자마자 놀이감부터 찾으며 놀기를 시작하는 아이들이다. 허기만 메워지면 노는 일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요령껏 레스토랑 놀이나 우주선 놀이로 아이를 먹인다.

나: "손님. 나물밥 주문하셨나요? 나물밥 나왔습니다."
준수: "저는 김밥을 먹고 싶은데요."
나: "손님. 김밥은 예약해드릴께요. 지금은 이 밥 드시고, 나중에 오세요."
준수: "네, 알았습니다~."
혹은,
나: "준하별! 준하별! 착륙준비 바랍니다. 지금 우주선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준하가 입을 벌리고 숟가락 우주선이 입안으로 들어간다)
"준수별! 준수별! 착륙준비 바랍니다. 앗 기체가 불안정하군요. 얼른 착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준수: "기체가 불안정한게 뭐야?"
나: "우주선이 많이 흔들린다는 얘기야. 고만 먹을 거야?"
준수: "아냐 더 먹을래. 아~!"

늘 놀이를 하는 건 아니다. 먹으러 엄마에게 달려오기 시합을 하기도 하고, 또 국수나 떡국 같은 음식은 제법 오래 앉아서 스스로 먹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주 천천히 먹는다. 천천히 먹으면서 오래 먹어서 많이 먹는다. 어떤 때는 먹이는 데만도 한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_-;

먹여주는 일이 좋지 않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혼자 앉아서 스스로 먹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먹도록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직은 무언가 "억지로 해야만 하는 일"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지 않다. 놀이에 열중해 있는 아이들을 억지로 붙잡아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지금 놀이에 언제라도 풍덩 빠져든다. 그것은 그림을 그려도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그림 그 자체가 됨을 의미한다. 책을 비스듬하게 놓는 일, 블록을 쌓는 사소해보이는 일에도 온 정신이 온전하게 하나로 모아져서 그 행동을 하는 아이 자신의 존재 조차 잊는 것이다. 인생에서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게다가 그런 시간들에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일부러 식사시간에 집중하여 먹이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놀면서 조금씩 먹을 것이다. 그건 차리고 치우는 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못할 일이다. 그래서 끼니때 집중하여 먹인다. 근데 그건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아이들은 배가 부르면 잘 놀기 때문이다. 배가 고플땐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짜증을 내거나 뭘 하냐고 비집고 들던 녀석들이 배가 부르면 어느새 내 곁에서 저만치 멀리 떨어져서 놀고 있다.

하여 나는 하루 중 아이들 저녁을 다 먹이고 난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이제 치우기만 하면 된다는 안도감. 하루의 일을 대부분 잘 끝냈다는 성취감으로 뿌듯해진다. 이제 재우기만 하면 나도 쉬면서 하고 싶은 일을 맘껏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한 몫한다. 내가 아무리 아이들을 예뻐한다해도 나도 내 시간도 갖고 싶고, 좀 쉬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저번엔 저녁을 자알 먹은 아이들이 번갈아서, 거의 동시에 똥을 눈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약간 허탈해졌었다. 쌓아올린 탑이 무너진 느낌이랄까. 채워넣은 독에서 물이 빠진 느낌이랄까.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이런 일일 것이다. 흔적이 남지 않는 일상을 쌓아가는 일. 썼다 지우는 모래사장의 파도처럼.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무언가가 아이들을 자라게 하고 있을 것이다.

by bobab | 2009/02/02 01:34 | 아이키우기 | 트랙백 | 덧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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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02/02 09:5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02/04 23:53
휴~ 저에게도 힘든 일이긴 한걸요? 그냥 당연하게 쉽게 되는 날도 있고, 아, 오늘은 좀 누가 해줬으면 하는 날도 있구요.

언젠가는 이런 날들도 다 지나가겠지요.^^
Commented by 흐뭇 at 2009/02/02 10:04
느긋하고 여유롭게 밥을 먹이던 보림씨 모습이 인상적이였어요.
저는 급한 성격탓에 얼른 먹이려고 허둥거리는데,
조금 천천히 즐길 수 있도록 해봐야겠어요.
봄에 꼭 와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02/04 23:54
어머나...저도 애들이 크면서 조금씩 그렇게 된 것이랍니다. 저도 애들 기다리는 게 힘들고 조급해지면 책을 읽기도 해요. 그럼 기다리는 게 덜 지루해지지요. ^^ 보통 책을 읽을 때는 애들이 덜 달려왔으면 하게 되니까요.
Commented by 인아 at 2009/02/02 10:28
식당 놀이 아이디어 괜찮은데요? 아이가 말 알아듣기 시작하면 저도 해봐야 겠어요. 물론 지금도 저 혼자 떠드는 거지만 오늘 이유식엔 무엇무엇이 들어갔단다, 맛있니? 등 말을 시키며 먹이고 있습니다. 생각만큼 많이 안먹어서 좀 허탈할 때도 있지만 억지로 먹이진 않으려고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02/04 23:55
오, 애가 어릴때 말을 그렇게 많이 시키면서 먹이는 일은 참 쉽지 않은데... 식당놀이 아이디어는 준수의 것이랍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 따라하기 좋아하니까요. ^^
Commented by cenne at 2009/02/02 13:07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전 쌍둥이 키우는데요. 얘들은 먹는 걸 좋아해서 밥 차려서 쟁반에 갖다 주면 둘이서 잘 먹습니다. 먹다가 다른 놀이를 하기 시작하면 밥을 치우죠. 그런데 애들 먹기 좋게 한그릇 메뉴로 주다보니 한정되 있어서 그게 약간 걱정입니다.
남자애들이지만 소꿉놀이를 좋아해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02/04 23:56
쌍둥이 보러 가야겠네요. 저희 애들도 남자애들이지만 인형을 아주 좋아하지요. 쌍둥이는 어느 정도 키우고 나면 훨씬 수월한 점도 있지요?
Commented by leiru at 2009/02/02 13:32
거참 대단하세요. 저는 늦은 동생이 있는데 (벌써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태어난 동생이죠) 먹기 싫어하고 깨작깨작 먹는 걸 보고 있으면 제가 먹이는 게 아닌데도 짜증이 나서 가끔 한 소리 하게 되던데요. :)
Commented by bobab at 2009/02/04 23:57
오, 저도 동생들을 바라볼때의 느낌은 제 아이들을 볼 때와는 완연히 달랐지요. 어미가 되면 참 많은 것이 달리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twentyfive at 2009/02/02 13:38
참 개구장이 처럼 생겼네요.ㅎㅎ
Commented by bobab at 2009/02/04 23:58
남편의 표현에 의하면 "초절정 개구장이"랍니다.
Commented by 달걀지단 at 2009/02/02 13:51
우리도 그렇게 자랐겠죠.
부러운 글입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02/04 23:58
그렇지요. 모두.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라서 아이 키우는 일이 벅차고 행복한 일인가 봅니다.
Commented by 평온 at 2009/02/10 23:42
아아아.. 드디어 이글루스에 가입했네요. 이런일에 워낙 게을러서 이때껏 눈으로만 읽고 갔지 뭐예요. 사실은 내 신용정보가 또 다른 곳에 들어가는 일이 요즘은 참 싫어서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보림씨 글은 참 감탄이 절로 나오는 좋은 글이라 덧글 하나 안달고 나가는 일이 너무 미안했거든요. 이제 조금 마음의 짐을 덜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먹이는 일에 대해서는 요즘 조금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전보다 불성실해진것 같아서요. 몹시 아프고 나서는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조금만 무얼 해도 힘 들다는 느낌이 들고, 전보다 쉽게 지치고 그러네요. 왜일까요. 기운차게 움직이고 이것저것 만들어 먹이고 해야 하는데, 보림씨 글 읽다보면 내 아이들에게 미안해져요. 정말 대단해요, 보림씨..
Commented by bobab at 2009/02/23 03:11
덧글 달아주시려고 가입까지 하셨다니 황송합니다.

어머, 저도 한동안은 열심히 이것 저것 만들다가 또 한동안은 게으르게 손놓고 지낸답니다. 글쓰는 거 보면 아마도 짐작이 가실텐데요. -_-;
Commented by 놀이네트 at 2009/02/19 11:29
안녕하세요. 링크 신고합니다.

www.playkorea.net 놀이네트
아이들에게 놀이는 또다른 생명입니다
Commented at 2009/03/20 15:5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9/04/02 23:0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05/09 02:08
안녕하세요? 이렇게 안부도 남겨주시고 넘 감사해요. 제가 진짜 오랬동안 뜸했지요? 헉! 벌써 석달이나 되었군요. 뭐 자잘한 사건은 있지만 큰 틀에서는 무사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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