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9월 24일
아직 표류중
살던 집에서 짐을 꾸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을 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낯선 곳에서 살 집을 구하는 일은 정말 처음이다. 낯선 이 나라에 떨어지자마자 해결해야 할 가장 급박하고 중요한 그 일-집을 구하는 일-은 이 떠남을 여느 다른 떠남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런던이, 과연 그 타워브릿지가 있고, 버킹엄 궁전이 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는 그 런던인가? 사실 그 런던과 내가 지금 있는 런던은 같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곳에 온지 벌서 2주일이 지났지만, 소위 관광코스가 몰려 있는 지역으로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살고 싶은 곳, 살 집을 찾으려는 곳인 런던의 북부만을 맴돌고 있다.
집을 구하는 일이 쉽게 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지역에서, 원하는 가격대의 집을 구하자니-비교적 안전하고 살기 좋은 동네에서 저렴한 가격의 좋은 집을 구하는 것-매물을 찾기가 몹시 힘들다. 어쩌다 나온 매물도 누군가에게 잽싸게 낙아 채여서, 헛물을 켠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아이들이 있는 관계로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까지 붙여서 집을 고르니 더더욱 쉽지가 않다. 카페트를 깐 집이 많은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나무바닥인 집을 찾고, 향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비싼 땅에 동서남북향 사방으로 집을 지어 놓은 곳에 남향집을 (이젠 그나마 포기해서 북향집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한다) 찾고 있으니...사실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우리가 원하는 가격의 집이 나와서 그 집을 우리가 잡는 것은 천운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첫날, 덜커덕 holding fee를 낸 집이 있는데, (참고-holding fee란 집을 빌리려는 사람이 빌리고 싶은 집이 있을 경우 집 주인에게 offer 즉 얼마의 세를 내고 얼마 동안 살고 싶다고 제안을 하면서 내는 돈으로, 그 돈을 내면 그 제안에 대해서 검토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는 그 집을 보여주지 않는 대가로 내는 것이다. offer가 받아들여졌는데도 집을 빌리려는 사람이 그 제안을 취소하면 그 돈은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다. 다만 집 주인이 offer를 거절하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 결과를 2주 동안 기다렸다. 그 집은 어느 부동산 회사가 소유한 집이었는데, 그 회사가 어찌된 일인지 약속한 날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단기로 머물기로 한 집에서 당장 방을 빼야하는 상황이었기에 답을 주는 날이 하루 미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당장 다음날부터 지낼 곳을 다시 알아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민가방 네 개, 큰 배낭 두 개, 기내 반입용 가방 한 개라는 대량의 짐과 펄펄 뛰는 어린아이 둘을 끌고 당장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렇게 갑자기.
애들을 재우고 난 밤에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민박집, 그리고 단기로 방을 빌려 주는 곳에. 민박집은 당장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단기로 지낼 수 있는 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민박집에서 지낼 수 있는 날까지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지금 있는 곳은 골더스그린 지역에 있는 3인용침대 방으로, 하루에 54파운드짜리 싸구려 호텔이다(호텔한테 싸구려라고 말하긴 미안하지만, 와 보니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54파운드면 우리나라 돈으로는 10만원도 넘는 방인데, 런던에서는 가장 저렴한 여관방 수준의 가격이다). 호텔은 빨래도 할 수 없고, 밥도 해먹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어, 전용 화장실이 있다는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되도록 민박집에서 머물 생각이다.
아무튼 현재 우리는 표류중이다. 먼저 offer를 낸 집에서는 우리가 제안한 값보다 높은 값을 불러서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으므로, holding fee를 돌려받기로 했고,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시 집을 알아보러 다녀야 한다. 지금 마음에 든 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또 현재 그 집이 수리중이어서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해도 민박집에 열흘 이상은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이런 시간들이, 비록 편안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고 생각한다. 집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가 있는지 노크해볼 필요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그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볼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는 것이, 목욕을 하고나서 옷을 걸치지 않고도 욕실 밖을 나올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럽고도 행복한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시간들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 알 수 있겠는가. 아니 안다 해도, 이만큼 더욱 절절하게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 by | 2009/09/24 06:31 | 돌아다니기 | 트랙백 | 덧글(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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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맞춤한 집이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아마 어딘가에서 네 식구를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을 거예요.
멀리서 응원할게요.
여럿이 공동으로 빌려서 쓰는 게, 잘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저희는 애들이 있어서 참 쉽지 않네요. 아예 애들 있는 집이랑 공동으로 빌려서 쓰면 모를까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와요. 아직 집이 어수선하고 날씨는 많이 추워져서 구경을 다닐만한 맘의 여유는 그다지 생기지 않아요. 그래도 집이 있으니 정말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