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표류중

살던 집에서 짐을 꾸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을 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낯선 곳에서 살 집을 구하는 일은 정말 처음이다. 낯선 이 나라에 떨어지자마자 해결해야 할 가장 급박하고 중요한 그 일-집을 구하는 일-은 이 떠남을 여느 다른 떠남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런던이, 과연 그 타워브릿지가 있고, 버킹엄 궁전이 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는 그 런던인가? 사실 그 런던과 내가 지금 있는 런던은 같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곳에 온지 벌서 2주일이 지났지만, 소위 관광코스가 몰려 있는 지역으로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살고 싶은 곳, 살 집을 찾으려는 곳인 런던의 북부만을 맴돌고 있다.

집을 구하는 일이 쉽게 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지역에서, 원하는 가격대의 집을 구하자니-비교적 안전하고 살기 좋은 동네에서 저렴한 가격의 좋은 집을 구하는 것-매물을 찾기가 몹시 힘들다. 어쩌다 나온 매물도 누군가에게 잽싸게 낙아 채여서, 헛물을 켠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아이들이 있는 관계로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까지 붙여서 집을 고르니 더더욱 쉽지가 않다. 카페트를 깐 집이 많은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나무바닥인 집을 찾고, 향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비싼 땅에 동서남북향 사방으로 집을 지어 놓은 곳에 남향집을 (이젠 그나마 포기해서 북향집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한다) 찾고 있으니...사실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우리가 원하는 가격의 집이 나와서 그 집을 우리가 잡는 것은 천운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첫날, 덜커덕 holding fee를 낸 집이 있는데, (참고-holding fee란 집을 빌리려는 사람이 빌리고 싶은 집이 있을 경우 집 주인에게 offer 즉 얼마의 세를 내고 얼마 동안 살고 싶다고 제안을 하면서 내는 돈으로, 그 돈을 내면 그 제안에 대해서 검토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는 그 집을 보여주지 않는 대가로 내는 것이다. offer가 받아들여졌는데도 집을 빌리려는 사람이 그 제안을 취소하면 그 돈은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다. 다만 집 주인이 offer를 거절하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 결과를 2주 동안 기다렸다. 그 집은 어느 부동산 회사가 소유한 집이었는데, 그 회사가 어찌된 일인지 약속한 날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단기로 머물기로 한 집에서 당장 방을 빼야하는 상황이었기에 답을 주는 날이 하루 미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당장 다음날부터 지낼 곳을 다시 알아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민가방 네 개, 큰 배낭 두 개, 기내 반입용 가방 한 개라는 대량의 짐과 펄펄 뛰는 어린아이 둘을 끌고 당장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렇게 갑자기.

애들을 재우고 난 밤에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민박집, 그리고 단기로 방을 빌려 주는 곳에. 민박집은 당장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단기로 지낼 수 있는 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민박집에서 지낼 수 있는 날까지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지금 있는 곳은 골더스그린 지역에 있는 3인용침대 방으로, 하루에 54파운드짜리 싸구려 호텔이다(호텔한테 싸구려라고 말하긴 미안하지만, 와 보니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54파운드면 우리나라 돈으로는 10만원도 넘는 방인데, 런던에서는 가장 저렴한 여관방 수준의 가격이다). 호텔은 빨래도 할 수 없고, 밥도 해먹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어, 전용 화장실이 있다는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되도록 민박집에서 머물 생각이다.

아무튼 현재 우리는 표류중이다. 먼저 offer를 낸 집에서는 우리가 제안한 값보다 높은 값을 불러서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으므로, holding fee를 돌려받기로 했고,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시 집을 알아보러 다녀야 한다. 지금 마음에 든 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또 현재 그 집이 수리중이어서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해도 민박집에 열흘 이상은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이런 시간들이, 비록 편안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고 생각한다. 집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가 있는지 노크해볼 필요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그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볼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는 것이, 목욕을 하고나서 옷을 걸치지 않고도 욕실 밖을 나올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럽고도 행복한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시간들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 알 수 있겠는가. 아니 안다 해도, 이만큼 더욱 절절하게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by bobab | 2009/09/24 06:31 | 돌아다니기 | 트랙백 | 덧글(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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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暗雲姬 at 2009/09/24 08:02
집이 사는 곳이 아니라 값을 매기는 곳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사람들이 한 번쯤 그런 상황에 처해보면 좋을 듯.
얼른 맞춤한 집이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아마 어딘가에서 네 식구를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을 거예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45
네...여기가 우리집이다...생각하고 사는 곳이 우리집인가 봐요. 집도 인연이 있겠지요.
Commented by CrysTal at 2009/09/24 08:54
고단한 생활에서도 감사함을 느끼시는 bobab님을 본받고 싶습니다. ^^
멀리서 응원할게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46
있을 때 못느끼던 걸 알게 되었을 뿐이지요. 흑흑...
Commented by 미세스봉봉 at 2009/09/24 09:27
어서 네 식구 편히 기댈 집이 구해지길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46
응원 고맙습니다.^^
Commented at 2009/09/24 11: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48
관심과 조언 고맙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알려주신 곳은 저희가 있어야할 동네에서 너무 멀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Commented by 콩콩 at 2009/09/24 12:44
얼른 좋은 처소를 구하시길 바래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48
네...고마워요.
Commented by RINA at 2009/09/24 20:13
요즘 런던에 적절한 렌트방이 부족하다고 하더라구요. 아마도 학기시작과 맞물려서 그런거 같아요. 그리고 이미 아시는 정보인지 모르겠지만, 마루바닥인 집은 창문이 이중창이 (double glazed windows) 아니면 겨울에 정말 혹독하게 추워요.. ㅜㅜ 저도 처음에 집이 카펫인게 너무 싫었지만 마루바닥 집에서 겨울을 보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거든요. 좋은 집 빨리 구하시길 바랄께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49
오호...진작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요. 지금 구한 집은 온통 마룻바닥인데 정말 썰렁합니다. 다음엔 침실이라도 카펫인 집을 구해야 할까봐요.
Commented at 2009/09/24 22: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50
고맙습니다. 전화번호 기록해 놓겠습니다. 카페도 가볼께요. 한번 놀러 오세요....
Commented at 2009/09/24 22:3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52
고맙습니다. 남편학교가 런던의 북쪽이라 뉴몰든쪽은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근데 중고 유모차 사러 뉴몰든 갔더니 동네가 참하고 좋던데요...다만 학교에서 너무 멀어서...
Commented by 海仁 at 2009/09/26 00:44
저도 런던에 2년정도 살았던 적이 있었어요. 벌써 5년도 넘었지만.. 그 때도 집구하는게 정말 힘든일이었는데.. 루츠도보고 저팬센터광고판도 매일가서보고 영국사랑도 수시로보고... 아주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적당한 가격선에 노팅힐의 플랫을 6명이 함께 사용할 수 있었어요. 일본인. 프랑스인. 한국인이사는 다국적아파트여서 참 좋은 기억이었던 것 같아요. 동분서주하던 생각이나서 보림님 지금 어떤기분일지 .. 아이들까지 있으니 저보다 더 애타는 시간이 되실것 같아요. 힘내세요. 좋은집! 꼭 찾으실꺼에요. 신랑 아이디에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54
고마와요.
여럿이 공동으로 빌려서 쓰는 게, 잘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저희는 애들이 있어서 참 쉽지 않네요. 아예 애들 있는 집이랑 공동으로 빌려서 쓰면 모를까요.^^
Commented at 2009/09/28 16: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56
꼭 마음에 들었다기 보다는, 이제 그만 방황하고 싶은 승환의 성화에 밀려 결정했어요. 예상한대로의 단점은 있는, 그래도 장점이 많은 집이지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와요. 아직 집이 어수선하고 날씨는 많이 추워져서 구경을 다닐만한 맘의 여유는 그다지 생기지 않아요. 그래도 집이 있으니 정말 좋네요.
Commented by nadia at 2009/09/30 11:57
힘내세요 곧 정착하셔서 가족을 보듬으며 사실거라 믿습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57
네. 고맙습니다. 정착 안해도 보듬으며 살았어야 했는데, 그동안 너무 힘들어 지쳤었나 봅니다.
Commented at 2009/10/04 10: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10/05 11:58
고마와요. 정말 집도 인연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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