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05일
드디어 우리집에

드디어 '우리집!'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에 살게 되었다. 런던에 도착한지 꼭 17일만의 일이다.
그동안 단기로 머무는 방에서 2주일, 호텔에서 하루, 민박집에서 이틀을 묵었다.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자는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건만, 이 일이 이토록 눈치 보이고 힘든 일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마도 여섯 살, 세 살의 에너지 넘치는 두 아이들과 함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머문 공간이 호텔처럼 방 하나만 사용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한 집에서 다른 방에 사는 사람들과 부엌과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어서, 프라이버시는 둘째 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 제일 어렵고 힘들었다.
덕분에 나와 승환은 아이들에게, “쉿! 조용히 해야지.”, “문 살살 닫아라.” “엄마가 문 쾅 닫지 말랬지!”, “뛰지 마. 아래층 사람이 시끄럽게 생각해.” 등등의 말을 내내 입에 달고 살았다.
소리를 낮추고 존재감을 적게 하는 일이 여럿이 함께 사는 공간에서 당연히 지켜야 할 예의이긴 하나, 떠들고 웃고 장난치고 싸우다 넘어져서 울고불고 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아이들에게 늘 조용히 이야기하고, 얌전히 있도록 강요하는 일이 나는 거꾸로 미안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해서 옆방 사람들에게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도 미안했던 것이다. 특히 장난치다 넘어져서 울음을 터뜨린 아이의 입을 내 손으로 막아서 소리를 줄이려 했던 그 순간의 비참한 기분이란...
매일 집 알아보러 나가야지, 부동산에 전화하고 전화 받아야지, 돌아서면 닥쳐오는 끼니 해결해야지, 애들 간식 먹여야지...아이들 시중에 하루의 일과도 벅찬데 옆방 사람 눈치까지 보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나도 승환도 지치다 못해 점점 황폐해지고 있었다.
여차저차해서 들어가려던 집은 가격을 높게 불러서 못 들어가게 되고, 또 다른 집은 침실은 하나인데 애가 둘인 가족을 받을 수 없다 해서 못 들어가게 되고... 이제 다시 맨땅부터 시작인가, 하던 차에 전에 한번 보았던 정원 딸린 집을 부동산에서 원래 가격보다 많이 깎아주겠다 하여 지친 승환이 망설이는 나를 밀어부쳐서 갑작스럽게 계약을 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집이 된 곳은 런던의 Golders Green이라는 지역에 위치한 단독주택형 집이다. 하나의 2층 건물이 4개의 집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중 우리는 1층의 반쪽과 정원의 반쪽을 쓰는 것이다.
런던은 시내 중심부터 외곽으로 나가는 순서로 zone1, zone2, zone3...zone6까지 나뉘어 있는데 골더스 그린은 그중 2존에 가까운 3존이며 시내를 중심으로 런던의 북서쪽 지역이다. 남편이 다닐 학교가 시내 북쪽에 있어서 우리는 계속 런던의 북서쪽에서 집을 알아보았다. 원래는 2존에 집을 구하려 했으나 우리가 원하는 조건의 집은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3존에 집을 구하게 되었다. 골더스 그린 지역은 비록 3존이라 교통비가 좀 더 많이 들긴 하지만, 유태인이 모여 사는 지역이라 범죄율도 낮고 안전하다고 한다. 한국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한국슈퍼도 2개나 되고, 맛있는 한국식당도 하나 있다. 또 Hampstead Heath라는 큰 공원도 가까이 있어서 환경도 좋은 편이다.
이 지역이 괜찮다는 건 알았지만, 나는 이 집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정원이 있는 집이 아이들에게 좋긴 하겠지만, 이 집의 거실이 북향이고 거실의 창이 홑겹 유리인데다 넓어서 겨울에 추울 것 같아서였다. 홑겹 유리창에 환기를 위한 팬까지 만들어 놓아서 늘 구멍이 뚫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 이런 집에 난방을 얼마나 해야 훈훈하게 지낼까 싶어서였다. 부동산과 집주인은 보일러가 새것이라서 효율이 좋다며 추운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비싼 가스 값은 어찌 감당하라는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들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집이 생겨서 너무나 기쁘다. 바닥이 부서져라 쿵쿵거리며 뛰어다녀도 그냥 놔둬도 되고, 애들이 떠들고 울고 소리쳐도 조용히 해라 잔소리 안 해도 되고, 노크하지 않고 화장실에 들어가도 되는 집이.
집이 생겨서 참 좋다.
# by | 2009/10/05 11:43 | 런던생활기 | 트랙백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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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준수가 정말 많이 컸네요
그나 저나 봄은 6개월 후에 올 예정이니..-_-;
엄마~~! 소리지르면서도 크게 아프지만 않으면 좋아하던 준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준수 학교 생활도 기대된다.
bobab님처럼 일단 가서 부딪치는 용감함은 발휘해 본적이 없지만요..
일단 한가지 팁을 드리고자 답글을 답니다.
홑겹 유리창에는 방풍 비닐을 꼭 씌우도록 하세요.
인테리어 DIY 샾 같은데 가시면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별거 아닌거 같지만 방한에 도움이 많이 된답니다.
그리고 춥다고 전기난방 하지 마세요. 가스값보다 더 비싼게 전기값이거든요.. 추우시면 가스난방을 약간 더 하시는게 나을거에요.
다 마땅치는 않겠지만 마땅한 것으로 고쳐가면서(집과 마음과)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집을 구했으니 한시름 놨네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요.
애쓰셨어요.
그런데 고생기는 늘 흥미진진~! ㅎㅎ
어제 어머니랑 통화했구요.
그 멀리 영국까지 저희 농산물이 간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고추가루 빻는대로 준비해서 보내드릴께요.
고마워요.
축하드려요.
넘 고생하셨는데.. 그래도 이제 끝.
좋은 일만 있으실꺼예요.
케첩이랑 볶은현미 같이 넣었어요.
케첩도 두루두루 퓌레처럼 써도 괜찮더라구요.
지난번에 준수가 현미를 오도독 씹어먹던게 기억이 나는데
남은 게 얼마안되서 조금 넣었어요.
무사히 보림씨네 있는 곳까지 가기를 기도합니다.
쌀은 나오는 데로 알려드릴께요.
몇 키로를 보내야 할까요?
저희 포장단위가 20키로인데~
주소는 미리 주시면 좋겠어요.
^^
일단 겨울을 지내는 일을 잘 준비해야 겠네요. 런던에간 내 친구도 첫 겨울이 너무 힘들었다고, 전기 담요 없었으면 못 지냈을거라고 하던데 많이 춥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덧글을 보니 전국 각지에서 토종 식재료를 런던까지 공수하고 있는 듯 한데, 보림씨 그 극성이 런던에서도 진가를 발휘할 모습을 즐겁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건강 조심하구요.
준수 표정보니 아이들은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듯 해서 안심이예요.
겨울엔 그냥 안춥게 보일러 돌리면서 살려구요. 함 어떻게 되나 보지요, 뭐. 그리고 내년엔 이사를? ㅋㅋㅋ
여기가 집값이 비싼 건 사실이지만, 또 나름대로 해결책도 있어요. 집같은 것은 다른 사람과 쉐어하면 훨씬 저렴하게 지낼 수 있구요. 또 동네마다 차이도 크구요. 월세가 비싸긴 하지만 한국처럼 보증금이 많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것도 괜찮구요. 또 물가가 비싼 만큼 인건비도 비싸니까 바꿔말하면 월급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구요. 취직만 된다면 이곳에서 살아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님도 앞으로의 생활이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