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떠나있기 위한 짐싸기

어린아이 둘 데리고 휴양림에 가서 텐트치고 자고 밥 해먹으려고 차 트렁크며 좌석 발치까지 꽉 차도록 짐을 싸본 적은 두 번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집을 떠나 새로운 살림을 시작하기 위한 짐을 싸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작하기 전에는 그게 뭐 그리 어렵겠느냐 닥치면 다 할 수 있는 거지 하고 무조건 대책 없이 쉽게만 생각하는 내 평소의 버릇대로, 이번 역시 별 고민이나 심사숙고 없이 짐을 챙겨 왔다. 그냥 막연하게 이만하면 되겠지 하는 정도로.

런던에 와서 첫 한 달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건데 분명 잘 싸온 짐이 있고 잘 못 싸온 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하나의 물건 목록의 유용성을 떠나 큰 방향조차 잘 못 잡았다는 것도.

내가 싸온 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블로그 이웃님의 충고 덕에 여름옷은 뺐고, 가을과 늦가을에 입을 옷, 속옷, 내 면 생리대, 머플러와 모자류, 가방, 양말, 칫솔, 치약, 비누, 수건 6장, 행주 3장, 수세미(진짜 우리나라 수세미 열매를 삶아서 말린 것), 오리털 이불 속 2장, 얇은 이불 한 장, 야영용 두툼한 매트 2장, 책 몇권, 아이들 장난감인 나무블록, 전기밥솥, 코펠, 수저, 칼, 계란찜용 뚝배기, 플라스틱 밀폐용기, 물통, 쌀, 된장, 고추장, 소금, 참깨, 들깨, 들기름, 까나리액젓, 새우젓, 멸치, 김, 말린 생강, 미역, 비정제 설탕, 각종 밑반찬-멸치볶음, 깻잎김치, 우엉조림, 양념해서 구운 김-과 김치 2봉지. (그 외에 남편이 싼 노트북과 카메라, 빔 프로젝터, 외장하드등은 나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세히 쓰지 않겠다) 이것이 전부 이민 가방 네 개와 큰 배낭에 들어간 짐들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그 짐들로 살아보니, 대충 성적표가 나왔다.

나는 짐, 하면 대개는 제일 먼저 옷을 떠올렸는데 생각보다 옷이 많이 필요하지도, 절실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외었다. 의외로 가장 요긴했던 것은 당장 먹을 쌀과 밑반찬이었다. 그리고 이불과 야영용 매트. 전기밥솥과 코펠, 수저였다. 그리고 내가 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 것은 쿠션(혹은 베게), 무쇠 프라이팬, 아이들 책, 사전, 디럭스형 유모차, 우산, 우비(영국은 비가 옆에서 온다).

나는 짐을 쌀 때 한국에서는 값이 싸지만 영국에서는 비싼 것은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몇 개 더 넣고, 내가 일상에서 늘 쓰는 물건도 그리 비싸지 않거나 무거우면 뺐다. 영국에 가서 다시 사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데, 잘 싼 짐이란 생활에 꼭 필요한 아이템을 비록 적은 양이라도 골고루 갖추고 있는 것이지, 현지에서 구할 수 있다는 이유로 꼭 필요한 물건도 없는 짐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낯선 나라에 떨어지면 처음엔 그 물건을 어디가야 살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국엔 이마트가 없다. 즉, 들어가면 없는 물건 없이 죄 파는 그런 대형 슈퍼마켓은 없는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우리 삶에서 가치 판단의 기준이 결코 경제성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 돈으로 평가하는 가치가 적으나 많으냐보다 얼마나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냐가 훨씬 중요한 가치기준임을 말이다. 나는 값싸고 무거운 물건이라도 내가 매일의 생활에서 요긴하게 사용하는 물건이면 짐에 넣었어야 했고, 가볍고 비싼 물건이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뺐었어야 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사기 비싸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 챙겨온 밀폐용기같은 짐들로 가방을 채웠기에 당장 필요한 물건이 없어 며칠 동안 상당한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다시 이렇게 짐을 쌀 기회가 올까 싶지만, 설혹 짐을 싸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번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by bobab | 2009/10/16 09:50 | 런던생활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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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nadia at 2009/10/19 01:34
잘 읽었어요 . 만두랑 여행할때도 잘 생각해봐야겠어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24 19:57
이렇게 살러 가는 짐을 쌀때는 정말 필요한게 많은 것 같아요. 호텔에서 잘 때는 수건이랑 이불은 안싸가도 되잖아요.
Commented by posh at 2009/10/21 10:21
나두 런던살때 우산 안가져 가서 젤먼저 산 물건이지...
신혼여행때도 계속 비와서 비닐 우의 입고 관광했어...
준수는 갈수록 보림을, 준하는 갈수록 승환님을 닮아 가는듯.준하는 커서 여자들을 애태우겠는걸?^^

여기는 차로 왔다 갔다하니깐 우산이 거의 필요없어...
우리의 새로운 집은 작년 집보다 조금 중심지에서 벗어나서 결국 차 한대 더 샀다. 이제 외식과 쇼핑은 안하기로 결심하고...
근데 그러다 보니 배가 나온다...등산하면 바로 들어 가는데...

나도 이사짐싸고 피곤이 누적 되서 비행기 탔더니 일본에서부터 몸살기가 돌더라
; 2번갈아탔어 도쿄-시카고 경류했지...비수기라서인지 JAL티켓이 젤 싼걸로 올라 와있더라구...
그러더니 결국 여기와서 탈이 나서 1주일동안 약먹구 자고먹구 또 자고 했더니 D형 몸매가 되었다.

전화로 업무를 보다니 영어 문제 없나보다...
난 모르는 번호가 내 휴대전화에 뜨면 신랑에서 주는데ㅎㅎㅎ

Enjoy in London!!!
Commented by bobab at 2009/10/24 20:00
그래 여기는 비가 위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서 사람들이 우산은 별로 안쓰고 우비를 입던가 그냥 맞고 다니더라.

야...너 아파서 어쩌냐. 근데 아파도 약 먹지 마...힘들어서 아픈건 쉬면 낫는데. 약이 네 몸 상하게 할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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