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9일
낯선 땅에서 밥해먹기
아이들과 함께 이렇게 낯선 땅에 떨어졌을 때, 역시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은 밥을 해 먹는 일이었다. 승환과 나 이렇게 어른만 둘뿐이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빵으로도 때우고, 볼 일이 급하거나 하면 대충 거르기도 하면서 살 수 있었을지 모르나, 아이들이 있으니 그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끼니때가 되어 배고프면 뭔가를 반드시 먹어야 하고, 게다가 한국에서 이제껏 자라다 보니 "밥=쌀밥"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라 하루 세 끼니가 빵 종류로는 절대로 대충 때워지지가 않았다.
부실한 기내식으로 허기가 졌는지,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유난히 "밥!"을 외쳐댔다. 그래서 시차적응이 살짝 덜 된 새벽 6시에 옆방 눈치를 보면서 밥을 해서 먹었다.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쌀과 밑반찬으로 차린, 단기방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먹은 피난민의 식사 버전이었지만, 아이들도 나와 남편도 정말 맛있게 먹은 한끼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전기밥솥이 왠일인지 밥 한번 하고 나니 고장이 나버렸다. 손으로 직접 들고 오지 않고 부치는 짐에 넣어 버린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무튼 당장 밥을 해야 하는데 밥솥이 고장 났으니 큰일이었다. 싸가지고 온 코펠로 어설프게 밥을 지어보았지만, 압력솥에 지은 밥을 먹다가 먹으니 이건 아무래도 밥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뜸 안든 밥 먹다가, 물 부어 끓여 죽으로 먹으며 며칠을 버텼다. 마침 나가서 일 볼 것이 많으니 외식도 매일 하면서.
그러나 런던에서 매일 외식이 왠 말인가. 런던의 외식비가 장난이 아닌데. 하여 큰맘 먹고 쿠쿠 압력밥솥을 샀다. 그래서 그 이후로 밥을 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밑반찬으로 일주일을 먹었다. 한살림의 우엉조림, 멸치볶음, 김치, 김, 무말림무침, 깻잎김치...한국에서는 한 반찬을 길어야 2-3일 먹었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같은 반찬을 주니 아이들도 나와 남편도 맛있을 리가 없다.
지저분한 남의 부엌을 꾹 참고, 감자도 채썰어 볶아주고, 미역국도 끓이고, 된장찌개도 끓여 주었다. 한 끼에 단 하나의 새로운 반찬이나 국이 있을 뿐인데도 아이들은 정말 잘 먹었다. 아니, 사실 걸신들린 듯이 열심히 먹었다. 준수와 준하가 된장국물을 그렇게까지 열성적으로 떠먹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동안 내가 너무나 아이들을 부족함 없게만 키웠구나 반성이 되면서도, 막상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켠이 짠했다.
이제 내 집이 생겨 편안하니 반찬도 다양하게 해 먹을 수 있어서 참 좋다. 역시 밥을 제대로 먹는 일은 어디서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 by | 2009/10/29 12:07 | 런던생활기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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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게 부실하면 무얼 해도 짜증이 나기 마련이지요.
그나저나 갖고 간 것 다 떨어지면 거기서 한국 공장제품 아닌 제대로 된 재료들을 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역시 여기는 한국식 식재료는 부실하기 그지 없습니다. 해외살이가 다 그렇겠지요, 뭐. 이 땅에서 나는 것에 적응하며 살아야지요.
두루 건강하게 잘 지내시어요!
정말 매일매일 밥해먹는게 큰 일이에요... 특히 이나라는 외식이 비싼데다가 종류도 많지 않아서 선택의 폭도 좁구요. 그나마 중식이나 케밥이 가장 싸고 먹을만한데.. 고유의 독특한 향때문에 싫어하시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역시 집에서 밥 해먹는 게 최고지요.
겨울옷 한두개에 책 몇권 싸니, 가방 4개가 꽉 차던데...
우린 첨엔 그냥 냄비에, 그러다 10년째 유학중인 친구의 벗겨진 밥솥을...
그리고 이번 여름에 압력전기 밥솥을 장만했지...나두 쿠쿠
나도 두번째 부터는 미국 들어갈때 고추가루랑 된장, 고추장은 꼭 가져간다.
한국브랜드라도 재료는 다 중국산이더라구...
환율만 좀 좋아지면 좋을텐데...그치?^^
근데 준하는 카리스마있는 표정인걸!
준하. 진짜 카리스마가 대단하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