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밥해먹기

아이들과 함께 이렇게 낯선 땅에 떨어졌을 때, 역시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은 밥을 해 먹는 일이었다. 승환과 나 이렇게 어른만 둘뿐이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빵으로도 때우고, 볼 일이 급하거나 하면 대충 거르기도 하면서 살 수 있었을지 모르나, 아이들이 있으니 그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끼니때가 되어 배고프면 뭔가를 반드시 먹어야 하고, 게다가 한국에서 이제껏 자라다 보니 "밥=쌀밥"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라 하루 세 끼니가 빵 종류로는 절대로 대충 때워지지가 않았다.

부실한 기내식으로 허기가 졌는지,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유난히 "밥!"을 외쳐댔다. 그래서 시차적응이 살짝 덜 된 새벽 6시에 옆방 눈치를 보면서 밥을 해서 먹었다.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쌀과 밑반찬으로 차린, 단기방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먹은 피난민의 식사 버전이었지만, 아이들도 나와 남편도 정말 맛있게 먹은 한끼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전기밥솥이 왠일인지 밥 한번 하고 나니 고장이 나버렸다. 손으로 직접 들고 오지 않고 부치는 짐에 넣어 버린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무튼 당장 밥을 해야 하는데 밥솥이 고장 났으니 큰일이었다. 싸가지고 온 코펠로 어설프게 밥을 지어보았지만, 압력솥에 지은 밥을 먹다가 먹으니 이건 아무래도 밥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뜸 안든 밥 먹다가, 물 부어 끓여 죽으로 먹으며 며칠을 버텼다. 마침 나가서 일 볼 것이 많으니 외식도 매일 하면서.

그러나 런던에서 매일 외식이 왠 말인가. 런던의 외식비가 장난이 아닌데. 하여 큰맘 먹고 쿠쿠 압력밥솥을 샀다. 그래서 그 이후로 밥을 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밑반찬으로 일주일을 먹었다. 한살림의 우엉조림, 멸치볶음, 김치, 김, 무말림무침, 깻잎김치...한국에서는 한 반찬을 길어야 2-3일 먹었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같은 반찬을 주니 아이들도 나와 남편도 맛있을 리가 없다.

지저분한 남의 부엌을 꾹 참고, 감자도 채썰어 볶아주고, 미역국도 끓이고, 된장찌개도 끓여 주었다. 한 끼에 단 하나의 새로운 반찬이나 국이 있을 뿐인데도 아이들은 정말 잘 먹었다. 아니, 사실 걸신들린 듯이 열심히 먹었다. 준수와 준하가 된장국물을 그렇게까지 열성적으로 떠먹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동안 내가 너무나 아이들을 부족함 없게만 키웠구나 반성이 되면서도, 막상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켠이 짠했다.

이제 내 집이 생겨 편안하니 반찬도 다양하게 해 먹을 수 있어서 참 좋다. 역시 밥을 제대로 먹는 일은 어디서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by bobab | 2009/10/29 12:07 | 런던생활기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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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暗雲姬 at 2009/10/29 14:35
아무렴요, 무어든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니던가요.
먹는 게 부실하면 무얼 해도 짜증이 나기 마련이지요.
그나저나 갖고 간 것 다 떨어지면 거기서 한국 공장제품 아닌 제대로 된 재료들을 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31 07:33
네 맞아요. 저도 배고프면 애들에게 짜증을 많이 내게 되더라구요.

역시 여기는 한국식 식재료는 부실하기 그지 없습니다. 해외살이가 다 그렇겠지요, 뭐. 이 땅에서 나는 것에 적응하며 살아야지요.
Commented by highenough at 2009/10/29 15:22
어디서든 밥심이죠. :)
두루 건강하게 잘 지내시어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31 07:34
고맙습니다. 네 식구 모두 잘 지낸답니다.
Commented at 2009/10/29 20: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obab at 2009/10/31 19:17
네 천천히 하셔도 되요. ^^ 다른 일보다 번거로운 작업일텐데, 제가 죄송하지요.
Commented by roja at 2009/10/29 21:26
준하는 통통하던 볼살도 빠지고 이제 소년이 다 되었군요. 저도 해외에 사는지라 없는대로 먹이고 있어요. 이곳의 모시조개를 넣고 미소된장으로 국을 끓여주면 아주 열성적으로 먹더라구요. ^ ^ 쿠쿠밥솥에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ㅋㅋ
Commented by bobab at 2009/10/31 19:18
네. 전기압력밥솥은 정말 대단하고 고마운 물건이라니까요.^^
Commented by Semilla at 2009/10/30 03:12
저희 집도 한국 떠나면서 가져왔던 전기밥솥이 금방 망가져버려서 압력솥에 밥을 해먹곤 했는데 (밥물 못 맞추면 죽이 되고 떡이 되는..) 저는 결혼하면서 쿠쿠 밥솥을 선물받았어요. 어찌나 편하던지....
Commented by bobab at 2009/10/31 19:19
오~ 밥솥이 그렇게 잘 망가지는 모양이네요. 정말 밥 해결해주는 밥솥이 너무나 고맙지요.
Commented by marla at 2009/10/30 13:27
꼬꼬마들도 빵보다 밥을 찾는다니 너무 기특하고 귀엽구 그러네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31 19:20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정말 큰 듯 해요. 그러니 여기서 한두해 사는 것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주겠지요.
Commented by RINA at 2009/10/30 18:07
밥솥고장이 나는 경험을 하셨군요.. 한국에서는 문제없이 작동되는데 영국에서는 헤르츠인지 사이클인지가 안맞아서 밥솥이 터지는 일이 왕왕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럴경우를 대비하려면 한국에서 밥솥 구매 하기 전에 해외사용가능한것인지 고객센터에 문의를 하고 구입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어쨋든 여기서 쿠쿠밥솥을 사셨다니 다행이네요 ^^

정말 매일매일 밥해먹는게 큰 일이에요... 특히 이나라는 외식이 비싼데다가 종류도 많지 않아서 선택의 폭도 좁구요. 그나마 중식이나 케밥이 가장 싸고 먹을만한데.. 고유의 독특한 향때문에 싫어하시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Commented by bobab at 2009/10/31 19:21
정말 외식이 성공스럽다는 생각이 든 적이 별로 없었어요. 아마 비싼 값의 영향도 큰 듯해요. 음식자체가 먹을만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질이나 양에 비해 비싸다는 생각이 늘 드니까요.

역시 집에서 밥 해먹는 게 최고지요.
Commented by posh at 2009/11/02 12:22
밥솥에 쌀까지 싸가지고 간 보림 대단하다...유럽은 짐 많이 못 부칠텐데...
겨울옷 한두개에 책 몇권 싸니, 가방 4개가 꽉 차던데...

우린 첨엔 그냥 냄비에, 그러다 10년째 유학중인 친구의 벗겨진 밥솥을...
그리고 이번 여름에 압력전기 밥솥을 장만했지...나두 쿠쿠

나도 두번째 부터는 미국 들어갈때 고추가루랑 된장, 고추장은 꼭 가져간다.
한국브랜드라도 재료는 다 중국산이더라구...

환율만 좀 좋아지면 좋을텐데...그치?^^

근데 준하는 카리스마있는 표정인걸!
Commented by bobab at 2009/11/11 11:49
밥솥은 다 싸가지고 오는 분위기이던걸... 정말 유럽은 짐 양이 미국의 절반인거 같아. 배로 부친 짐 받는데 두달 걸렸어.

준하. 진짜 카리스마가 대단하지. -_-
Commented at 2009/11/06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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